2016.11.15 01:02

[蒼霞哀歌] 임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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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霞哀歌] 임고서원

종 목 :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명 칭 : 임고서원 (臨皐書院)
분 류 :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 9,299㎡
지정(등록)일 : 1985.10.15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관리자(관리단체) :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1553년(명종 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세웠다. 1554년(명종 9)에는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사액 된지 불과 5년 만에 사액되었으므로 초기 서원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 때 역사가 깊은 이 서원이 훼철 된 것은 개경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포은 선생을 향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191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 1965년에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에 보수정화 하였다.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은 포은 선생의 부모 묘가 서원 뒤편 부래산에 있기 때문이다. 부래산 기슭에는 포은 선생의 부 일성부원군 운관(云瓘) 묘와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 이씨 묘가 함께 있다. 그리고 서원 바로 옆에 묘소를 지키는 계현재(啓賢齋)가 있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나무가 자라나는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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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원철폐령에서 훼철되지 않은 사액서원을 찾아다니고 있다. 임고서원은 사액서원이다. 하지만 훼철되었다.

제일 특이했던 것은 구임고서원과 신임고서원이 존재한다는 것과 고직사가 다른 서원에 비하여 크다는 점이었다. 역시 포은이 가지고 있는 유림에서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부속 건물도 여러 동이 있었다. 조선은 망했지만 포은은 흥하고 있는 것이 자못 야단스러웠다.

서원 건축학적인 면에서 여러가지 특이점이 있을 것 같았지만 해설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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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isorane/22086177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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